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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간의 재발견] #3 믿음의 법칙과 양자역학의 관계

by 마케팅은 누구나 2020.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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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믿음에 접근하기 좋은 시대를 살고 있다. 지금 시대는 믿음에 대해서 과학적, 인문학적 탐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믿음에 대해 종교적 접근만이 가능했었다.

 

“무조건 믿어!”

“안 믿어지는 걸 어떻게 하나요.”

“부정 타니까 그런 말 마세요. 안 믿어져도 믿으세요.”

 

그러나 이제는 ‘믿는 대로 되는 법칙’의 유효성에 대해 다양한 경로를 통해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물리학의 총아라 일컬어지는 양자물리학에서는 세상 만물이 믿음이라는 일종의 ‘파동 에너지’로부터 영향을 받게 된다는 원리를 다룬다.

여기 검은색 스포츠카 한 대가 있다. 믿음으로 자동차를 움직여 보려 한다. 그러나 믿음만으로 가만히 서 있는 자동차를 움직이게 만든다는 주장은 생각만 해도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나의 강렬한 염원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가 자동차를 운전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면 어떤가? 전자보다는 어쩐지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양자물리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믿음이라는 파동 에너지는 무엇인가를 끌어당기는 힘과도 연관이 있다.

 

이번에는 10m가 족히 넘는 바위를 믿음으로 움직여 보려 한다. 믿음만으로 이처럼 큰 바위를 움직일 수 있다는 주장은 더욱 터무니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바위를 잘게 부수어 가루로 만든다면 어떠한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아무래도 바위보다는 바위 가루가 움직이기에 수월해 보인다. 이 현상은 이른바 ‘믿음의 크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바위를 움직일 수 있는 믿음이 있는가 하면 자갈조차도 움직일 만한 믿음이 없을 수 있다.

 

다시 한 번 더 입자를 더욱 작게 만들어 보자. 바위의 입자를 계속해서 분해하다 보면 분자 형태를 지나 마침내 물질의 최소 단위라 할 수 있는 양자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분자 단위까지만 해도 물체들은 각자가 지닌 고유의 특성을 보존하고 있다. 그러나 양자의 단계로 들어서게 되면 물체는 자신이 지닌 특성을 잃게 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히브리서 11:1)

 

‘Substance of things hoped for’ 믿음은 바라는 것들을 위한 물질.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들은 믿음이라는 물질로 이루어진다.

⦁믿음이라는 물질로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구성할 수 있다

아울러 보이지 않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말하고 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히브리서 11:3)

 

 

 

예를 들어 목재 의자를 원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 역시 최종적으로는 양자의 형태를 띠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양자를 이용해 목재 의자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힌트는 다음과 같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

양자는 끊임없이 진동하는 일종의 파동 에너지다. 따라서 양자는 다른 파동 에너지에 반응한다. 사람의 말과 생각 또한 파동 에너지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말과 생각에 영향을 받는다. 여기서 말하는 ‘말과 생각’은 불확신으로 흔들리는 연약한 파동 에너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한 방울의 의심도 섞이지 않은 강력한 믿음의 상태를 뜻한다. 사람의 생각이 사물을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사례가 양자역학의 ‘관찰자 효과’이다. 무슨 영문인지 입자는 사람의 관찰 여부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띤다. ‘관찰자 효과’에 대해 처음 듣는 이들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것이다.

‘관찰하고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입자 모양이 달라진다니…’

 

21세기 전후로 출판 또는 강의 시장에서 가장 많이 대두되는 화두 중 하나는 단연 ‘믿음’일 것이다. 성공한 경험이 있는 저자와 강사들은 공통적으로 주장한다.

“믿는 대로 된다.”

 

어쩌면 그들의 믿음이 목표 달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수도 있다. 다만 그 믿음이 본인에게도 유효할지를 의심할 뿐. ‘그 믿음’이 자신의 삶도 변화시켜 줄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 결국 그들의 삶은 그들의 믿음대로 되고 만다.

“살다 보니 거참 신기한 일을 다 경험하네.”

 

가령 걷지 못하던 당신의 지인이 안수기도를 받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뛰는 모습을 보았다 해도, 그것만으로 예수님을 당신의 주인으로 모시지는 않을 것이다. 믿지 않기로 마음을 정한 상태라면 그 어떤 기적을 보여 준다고 해도, 그는 그 사건을 통해 믿음을 선택하진 않는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에 ‘기적 경험’이라는 기억 또한 시간이 갈수록 희미해진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선택하신 최후의 보루는 기적이 아니었다.

 

- 〈믿음이 무엇이기에 구원을 이루는가?〉 중에서

 


구원에 대해 지금까지 이런 접근 방식은 없었다.

구원은 믿음으로만 주어진다. 그러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다.

믿음으로만 주어진다면서 행함을 논하니 이것은 구원의 모순일까?

 

구원에 대해 이렇게까지 섬세한 설명이 있을까? 누구도 풀어서 설명하지 않았던 구원의 메커니즘, 복음이 한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기술적 원리를 설명한다. 3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모태신앙으로 자라왔지만 스무 살이 넘어서야 복음을 깨닫게 된 저자,

자신처럼 복음을 깨닫지 못했을 누군가를 위한 메시지가 시작된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686253

 

구원의 밸런스

구원에 대해 지금까지 이런 접근 방식은 없었다. 구원은 믿음으로만 주어진다. 그러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다. 믿음으로만 주어진다면서 행함을 논하니 이것은 구원의 모순일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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